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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지상학 α] 땅을 허하라! —1969 알카트라즈 점거 사건

땅을 허하라! —1969 알카트라즈 점거 사건

 

1969 11 9 오후, 명의 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 미국 샌프란시스코 만을 선회하던 배에서 뛰어내려 작은 알카트라즈로 헤엄쳐갔다. 이들은 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다가 관리인의 요청에 따라 섬을 떠났다. 그날 이들 넷을 포함한 열네 명의 원주민이 다시 섬에 상륙했고, 다음날 샌프란시스코로 돌려보내졌다. 11 20 새벽 2, 20 부족 출신의 백여 명에 달하는 원주민이 다시 알카트라즈 섬으로 건너갔다. 이번에는 쉽게 떠나지 않을 결심이었다. 같은 오후, 이들은 섬이 원주민의 영토임을 선언했고, 1971 6월까지 장장 18개월간 계속될 점거가 시작되었다.

땅을 빼앗긴 자들

1960년대 말은 바야흐로 소수집단의 권리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즈음이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교육 공공시설에서의 분리·차별정책 폐지를 요구하는 흑인들의 민권운동이 본격화되면서, 다양한 민족과 집단이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여권운동, 남미계 이주민운동, 아시아계 미국인운동 등과 함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권리 확보 운동이 형태를 갖추어나가고 있었다.

알카트라즈 섬이 위치한 샌프란시스코베이 지역은 당시 미국의 원주민운동을 대표하는 본거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1961년에는 직장인과 가족을 중심으로 원주민 모임 베이 지역 미국원주민문제위원회 창설되었고, ‘원주민공동체행동(CAP)’ 지역 학생들의 방과 교육 원주민 문화 학습에 힘쓰고 있었다.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1968년에 만들어진 원미국인연합(UNA)’으로, 부족을 초월한 모든 원주민의 단합을 강조했다. 시기 베이 지역 원주민 운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학생들이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캠퍼스와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교의 원주민 대학생들은 제도적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원주민학Native American Studies Program 과목들을 자주적으로 개설해 수강했고, 원주민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해나갔다.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교 학생인 모호크족 출신 리처드 오크스는 모든 부족의 원주민들Indians of All Tribes’이라는 이름의 조직을 만들어 결속력을 키웠다.

이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되찾고자 했던 권리는 땅에 대한 권리였다. 그들은 백인에게 빼앗긴 땅을 돌려받아 다시 자신들의 방식대로 살아가기를 원했다. 마침 알카트라즈 섬의 용도 변경이 공론화되면서, 원주민들은 그들의 성장한 자의식과 권리의식을 실험해볼 장소로 섬을 택했다.

알카트라즈 선언

더록 같은 영화에서 그려진 대로, 알카트라즈 섬은 절대로 탈출할 없는 철옹성으로 널리 알려진 연방교도소 소재지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불과 2.2킬로미터 거리지만, 수심이 깊고 물살이 아니라 상어가 서식해 감옥에서의 탈출은 거의 불가능했다. 악명 높았던 연방감옥이 1964 철거되고, 4 후인 1968 섬의 소유권이 샌프란시스코 시로 넘어왔다. 원주민들은 섬의 전용권을 자신들이 갖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미국의 발전 과정에서 모든 땅을 빼앗긴 원주민에게 조각의 땅이라도 허락하라는 취지였다.

1969 11 9, 샌프란시스코 39 부두에서 섬을 향해 출발하기 직전 리처드 오크스는 미국의 대통령과 국민들에게 보내는 알카트라즈 선언 낭독했다.

아범the Great White Father 그의 백성에게

우리 미국 원주민들은 발견의 권리에 의해 알카트라즈라 불리는 섬을 모든 미국 인디언의 이름으로 소유권을 다시 갖기로 했다. 우리는 땅의 코카시언 거주자들 처리 문제에서 공정하고 명예롭게 대처할 것이며, 이에 다음의 조약을 제시한다.

우리는 24달러어치 유리구슬과 붉은 천을 알카트라즈 16에이커 땅값으로 지불할 것이며, 이는 300 백인에 의한 비슷한 거래의 전례에 입각한 것이다. 이는 300 맨하탄 섬을 가격보다 높다는 것을 알지만, 그동안 땅값이 올랐으니 고려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1에이커당 1.24달러인데, 지정거주구역 원주민에게 1에이커당 47센트 쳐주는 것보다도 높은 가격이다.

사기꾼과 관광객이 노리는 땅

사실 알카트라즈 섬은 식수가 부족하고 토양이 거칠어 거주에 적합한 땅은 아니었다. 연방감옥이 설치되기 이전에는 약간의 군사시설이 있는 정박지였고, 이전에는 원주민 부족들에 의해 임시 격리시설로 이용되었다. 알카트라즈 선언 알카트라즈의 열악한 환경이 백인이 원주민에게 정해준 이른바 지정거주구역Indian reservation’ 유사하기 때문에, 백인의 기준으로 보아도 섬이 원주민 거주지역으로 적합하다고 비꼬아 지적했다.

1. 이곳은 현대 시설과 동떨어져 있고 적당한 교통수단이 없다.

2. 깨끗한 상수도가 없다.

3. 위생시설이 불충분하다.

4. 채유권도 채굴권도 없다.

5. 산업이 없고 실업자가 많다.

6. 의료 시설이 없다.

7. 토양은 암석질로 생산성도 없고 사냥감도 없다.

8. 교육 시설이 없다.

9. 인구밀도가 항상 높았다.

10. 주민들은 언제나 죄수, 혹은 타인에게 얹혀사는 사람이었다.

알카트라즈 점거단은 운동이 원주민 거주지의 열악함과 원주민의 생활고를 상징적으로 알릴 사건으로 기획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흔히 보호구역이라 잘못 번역되어온 지정거주구역의 피폐함은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다. 경작에 적합지 않은 땅에서 뚜렷한 삶의 목적을 찾을 없었던 원주민들은 연방의 지원비를 도박이나 , 혹은 마약에 허비하면서 연명하고 있었다. 이들이 상대하는 것은 지원비를 노리고 달려든 백인 사기꾼들과 그들의 삶을 구경거리 삼아 다녀가는 관광객들이 전부였다. 거주구역에서의 원주민의 삶은 고되고 어려웠다. 집단별로 산정한 일인당 연소득과 평균수명에서 원주민은 최하위를 차지했다. 반면 재해사망률, 폐병과 알콜중독 환자 수는 최고치였고, 동일 범죄 수감기간 역시 가장 길었다.

원주민들은 섬의 점거를 통해 백인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그들만의 자유로운 공간을 운영할 있기를 희망했다. 점거 이후 알카트라즈 섬과 시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수립되기 시작했다. 점거 주도 세력은 향후 모금운동 등을 통해서 원주민학연구 센터, 미국원주민정신센터, 생태학연구소, 원주민교육기관, 원주민박물관 등의 시설을 세울 계획이었다. 알카트라즈 섬을 미국 원주민과 원주민학의 메카로 만들어보겠다는 포부였다.

알카트라즈 섬 점거의 끝

알카트라즈 점거 사건은 미국 여론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목표했던 대로 원주민이 처한 열악한 환경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각지에서 지지성명이 발표되었고, 인종을 초월한 동조자들이 섬을 방문했다. 지원금도 보내왔다. 1969 말에는 이미 700 명에서 1,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알카트라즈 섬에 살고 있었다. FBI 비롯한 정부의 수사기관들은 점거 당일부터 이들을 관찰하고 있었지만, 무력진압은 감행하지 않은 지도부와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관심과 호응에도 불구하고 알카트라즈 점거운동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완전히 철거된 것은 1971 초여름이었지만, 이미 1969 말부터 안의 상황은 혼란에 처해 있었다. 우선 점거 지도부 사이에서 권력 다툼이 시작되었다. 점거의 대표적 지도자는 모호크족 활동가인 리처드 오크스였지만, 그에 대한 비판 세력도 존재했다. 갑자기 몰려드는 인력과 재정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 구조가 수립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여러 사람들이 결정권을 행사하려고 나서면서 지도부는 분쟁을 일삼게 되었다.

섬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에 대한 통제도 문젯거리였다. 점거를 지지하는 다양한 원주민과 비원주민이 섬으로 들어와 함께 살게 되었는데, 알카트라즈는 인공으로 조성된 섬인데다 식수나 주거환경의 문제 때문에 많은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공간이 아니었다. 여기에 출신과 의도가 불분명한 사람들이 증가함에 따라 점거 한두 만에 섬에서는 음주, 마약, 폭력 등의 사태가 불거지게 되었다. 섬이 아노미 상태에 빠져들게 것은 1970 1 오크스의 열한 살짜리 양녀인 이본이 섬의 건물에서 추락사한 사건 이후의 일이다. 이본의 타살설이 제기되면서 오크스 부부는 섬을 떠났고, 뒤따라 점거를 주도했던 초기 구성원들이 흩어지면서 권력의 공백 상태가 초래되었다.

국내외 여론을 의식하여 강경 진압을 자제해왔던 FBI 지역경찰은 안의 상황이 통제가 불가능해지자 본격적인 철거 작전 수립에 들어갔다. 1970 5월에는 우선 자발적인 포기를 부추기기 위해 수도, 전기, 전화선을 끊었다. 그래도 버티던 최후의 점거자 15인은 결국 1971 6 11 석양을 감상하던 연방군의 투입으로 강제 퇴거되었다. 이들은 저항 없이 순순히 해안경비대의 배에 올랐다. 18개월에 걸친 미국 원주민 알카트라즈 점거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추수감사안하기 축제

알카트라즈 점거는 초기의 포부와는 달리 권력 싸움과 범죄 등으로 얼룩진 실패로 끝났지만, 이들이 표방한 정신은 다양한 원주민 운동을 통해 계승되었다. 1968 미니애폴리스에서 창설된 미국원주민운동(AIM)’ 알카트라즈 점거를 계기로 운동을 단계 진전시킨 대표적인 집단이다. 1969 점거 소식을 듣고 섬을 방문하기도 했던 AIM 1972 미국 대통령에게 20개의 요구 사항을 보냈다. 불평등 조약들의 폐기, 원주민으로 구성된 국가의 주권 보장, 부족의 조약권 회복, 억압적인 원주민 사무국의 폐지, 원주민 종교와 문화 보전 등이 그것이었다.

AIM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 74건의 연방시설 점거운동을 벌였다. 댐과 같이 원주민의 전통적 생활양식을 무너뜨린 구조물들, 보호구역 원주민을 억압적으로 통제하던 원주민 사무국 시설 등이 이들의 주도로 점거되었다. 1973, 과거 원주민 대학살의 현장에서 71일간 지속된 운디드니 점거 사건이 대표적이다. 원주민에 대한 국가의 폭력 사례들이 고발되었고, 원주민 청소년 교육을 위한 사무실들이 새로 만들어졌다. 1969 알카트라즈 점거를 시발점으로 이른바 알카트라즈-홍인紅人파워운동(ARPM)’ 1978 캘리포니아에서 수도 워싱턴 D.C.까지 평화적으로 횡단한 대장정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현재 미국의 원주민 지정거주구역에는 143 명의 원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원주민의 30% 주택이 없고, 59% 평균 이하의 주거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73% 원주민이 직업이 없다. 원주민의 평균수명이나 영아사망률은 미국 인종집단 별로 분류했을 여전히 최하위수준이고,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원주민에게 무관심하거나 그들을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알카트라즈 이후 분명히 변화는 존재했다. AIM 요구사항 일부가 받아들여져 입법화되었고, 원주민 사무국의 예산도 증가했다. 원주민 복지 후생을 위한 각종 조처가 취해지고 있고, 도시 혹은 대학 캠퍼스에서 원주민 관련 축제 행사들이 개최된다. 알카트라즈에서는 매년 유럽인과의 만남 이후 계속되어온 원주민의 살육과 희생을 기억하기 위해 추수감사안하기 축제un-thanksgiving festival 열리고 있다.

한 조각 땅의 공공성

우리는 사유재산제가 유효한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아주 옛날에는 소유자가 없거나 혹은 공동소유였을 땅들이 언젠가부터 누군가의 것이 되어 있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소유의 시작에는 무단점거, 배타적 점유, 그리고 폭력이 있었을 것이다. 전쟁, 영토화, 경계 짓기, 분할과 하사. 하지만 누군가가 지구 조각의 땅을 소유한다는 것이 정말 그렇게 당연한 것일까?

뉴욕을 무대로 활동하는 작가 이와사부로 코소는 『유체도시를 구축하라』에서 다양한 소수집단이 도시에서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투쟁해온 역사에 대해 있다. 코소는 앵글로색슨 미국인들 역시 한때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땅에 대한 침입자이자 무단점거자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먼저 성공적으로 땅을 점거한 스쿼터들은 이민 노동자, 노동조합, 여성, 성적 소수자, 흑인, 반전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의 생존하고 거주하고 노동할 권리를 부정해왔다. 스쿼터들에 의해 밀려난 소수집단들은 이에 대해 재점거로서 저항해왔다. 2011 월가에서의 점령운동은 ‘99% 1%’라는 빈부격차에 대한 분노의 표출로, 서민 경제 붕괴에 따른 주택차압 통보의 증가가 중에서도 원인을 제공했다.

코소는 뉴욕을 저항과 투쟁의 장소로 보면서, 국가와 자본주의가 거대하게 성장시킨 전쟁기계로서의 도시 반대하기 위해 거리로서의 도시 구축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거리로서의 도시 바로 투쟁의 공간으로서 전략적 가능성을 가지는 공간이다. 알카트라즈 점거로부터 46년이 흐른 지금, 현대 공간의 공공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우리는 과연 모든 이가 권리를 보장받는 생명의 거리를 시작할 있을까.

박진빈,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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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마 β] 웃음과 배설 혹은 아리스토파네스

웃음과 배설 혹은 아리스토파네스


비극에 관한 논의는 언제나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에 반해 희극에 관한 논의나 언급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는 아마도 희극이 가벼운,’ ‘진지하지 않은,’ ‘사소한,’ ‘웃기는등의 관념과 연관되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면에는 가볍고 진지하지 않은, 사소하고 웃음이나 유발하는 예술작품은 가난과 전쟁, 고통과 회한, 억압과 혁명, 불의와 투쟁, 이해할 수 없는 혹은 억울한 죽음이 난무하는 진지한세상일을 다루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 같다. 달리 보면 이는 이러한 문제를 오롯이 다룰 수 있는 드라마 장르가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비극이어야 한다는 사고의 반영은 아닐까.


20세기 독일,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의 희극 창작사는 이러한 고정관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나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은 물론, 독일 중산층의 허위의식과 나치즘에 대한 전복을 겨냥한 브레히트의 서사극 역시 희극 전통의 일부로 볼 수 있다. 또한 막스 프리쉬,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같은 브레히트 이후 독일어권 스위스 작가들, 하이너 뮐러, 페터 학스 같은 구 사회주의권 작가나 보토 슈트라우스 등 대다수의 진지한독일어권 작가들은 자신의 연극을 희극으로 보아줄 것을 요구하고, 극이 진지하게 공연되었을 때는 불만을 표시하기도 한다. 이들 작가에게 희극은 가볍지 않고 진지하며, 사소하지 않고 긴급하게 다루어야 할 중요한 문제에 관한 것이며, 피상적이기보다는 심층적이고, 즐겁기보다는 고통스럽다. 


비극 대신 희극, 비웃음과 쓴웃음 


사실상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의 20세기에 비극의 비장한 어조는 퇴조했다. 그 시대는 차라리 희극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작가들은 비극의 자본주의의 수직·수평 계열화와 이로 인한 불평등, 소외를 비롯한 현대의 비장한문제들을, 비극 대신 희극에 담아내고자 한다. 이유는 다양하다. 희극이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을 알게 해주는, 다시 말해 관객을 현실에 노출시키는 데 적합한 미학적 수단이라는 것이 대표적인 이유다. 희극이 구조적으로 거리를 가능하게 하고 그것을 통해 맥락에 대한 인식을 중재한다는 장점을 내세우는 경우도 있다. 혹자는 한 사회를 지배하는 거짓 파토스거짓 진지함을 폭로하고 풍자하는 데 적합한 장르로 희극을 추천한다. 더 나아가 희극은 저항의 무기로 간주되기도 한다. 마치 엑스레이처럼 사안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비극 고유의 엄숙한 태도로는 진지한 가면을 들춰내는 데 적합하지 않기에 희극이 필요하다는 관점도 있다. 

비극이 자아의 몰락을 통해 하나의 초월적인 의미질서를 증명하거나 혹은 새로운 의미질서를 설정한다면, 희극의 특성은 그러한 의미질서를 뚫고 공격한다는 데 있다. 때문에 희극적 소통방식의 본질은 의미의 해체, 특히 자아의 해체다. 이런 해체는 기존의 의미구역 내에 제3의 구역, 놀이공간을 열리게 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관객은 무대의 의미질서 안에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열린 제3의 놀이공간 속에서 자유를 얻게 된다. 희극은 동일성의 반복을 의미하는 위계질서의 언어가 아닌 대화적 언어를 통해 관객과 소통한다. 이때 희극성과 웃음은 언어에 의해 표현된 질서와 이성적인 것이 배제하는 그것, 즉 비이성적인 것, 혼돈스러운 것, 육체성을 발설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희극의 본질은 비판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와 위계적이거나 통합적이지 않은 소통방식에 있으며, 웃음은 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희극에서 유발되는 웃음은 흥겨운 파안대소라기보다는 공감의 ()웃음, 자기모순의 인식에서 오는 쓴웃음에 가깝다. 한마디로 희극은 모든 다른 장르보다 깨어 있는 장르. 그리고 희극의 이런 특성은 기원전 5세기, 희극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에 이미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희극의 기원, 코모스의 노래 


기원전 5세기 최전성기에 달했던 그리스 비극tragedy트라고스tragos,’ 즉 염소나 산양을 제물로 바치고 디오니소스를 향해 부르던 주신찬가에서 발전했다면, 희극comedy은 마을 축제 때 술에 취해 돌아다니며 평소에 쌓인 불평불만을 터뜨리면서 왁자지껄하게 몰려다니던 사람들의 행렬인 코모스komos의 노래로부터 기원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486년에서 120년 사이에 256명 이상의 희극 작가가 활동했고, 2,300편 이상의 작품이 공연되었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고희극old comedy 시대의 대표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11편과 단편 일부, 신희극new comedy으로 분류되는 메난드로스의 극소수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 희극이라 하면 곧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을 의미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희극 공연은 그리스 월력 엘라페볼리온(3/4)에 벌어지는 대 디오니소스제도시 디오니소스제에서는 비극보다 대략 50년 뒤인 기원전 487년 이후에 국가적으로 제도화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규모가 작은 레나이아제’(1/2)에서는 비극(기원전 430)보다 오히려 더 이른 시기(기원전 440)에 정기적으로 공연되고 있었다. 도시 디오니소스제가 수많은 외지인들이 행사를 지켜보기 위해 아테네로 몰려드는 대규모의 장대한 축제였다면, 레나이아제는 보다 오래되고 도시 내에 국한된 축제여서 아테네 시민들만 참석했다. 희극은 특히 레나이아제에서 주요 레퍼토리를 차지했고, 국가로부터 공인되기 이전에도 이미 사적으로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리스토파네스, 열한 편의 정치극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기원전 425년에서 기원전 388년에 이르기까지 40개 작품 중이 공연되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작품은 11편인데, 그 대부분이 당대 아테네의 정치적·사회적 현실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정치극이다. 그 대표적 풍자 대상으로는 대외전쟁(‹아카르나이 구역민들› ‹평화› ‹뤼시스트라테›)과 정치가·작가·철학자,(‹기사› ‹구름› ‹개구리›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인들›) 정치 제도와 폴리스(‹› ‹›) 등을 꼽을 수 있다. 당대의 사회문화적 경향이나 시사적인 사건들도 직·간접적으로 언급된다. 

전쟁을 비판한 아카르나이 구역민들› ‹평화› ‹뤼시스트라테세 작품은 평화에 대한 담론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희극이다. ‹아카르나이 구역민들에서는 아테네 민회가 휴전에 대해 논의하기를 거부하자 주인공이 스파르타와 사적인 휴전을 체결한다. 기원전 421니키아스 평화가 한창 협상 중이던 시기에 만들어진 평화에서 주인공은 그리스 전체를 위해 오랫동안 묻혀 있던 평화의 여신을 부활시킨다. 기원전 411년 시칠리아와 아테네의 적대감이 재발한 뒤에 공연된 뤼시스트라테에서는 양 진영의 여성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섹스 스트라이크를 꾸민다. 연극 속에서 여성들은 전쟁을 끝낼 황당한 계책을 성공리에 달성할 수 있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전쟁에서 아테네의 패배가 임박한 기원전 405

아리스토파네스는 개구리공연을 보러 디오니소스 극장에 모인 동료 시민들에게 진지한 정치적 조언을 제공하기도 했다. 

전쟁은 아리스토파네스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계기였지만 유일한 주제는 아니다. 그의 희극은 전쟁 중인 아테네를 배경으로 삶 자체의 주요한 갈등들 또한 극화하고 있다. 구세대와 신세대 간의 적대감은 구름에서 아들과 아버지 간의 대립이라는 형태로 구현된다. 결혼을 전쟁터 삼아 벌어지는 양성 간의 전쟁은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인들여인들의 민회뤼시스트라테의 주제다. 이외에도 부자와 가난한 자, 권력자와 억압받는 자의 대립은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전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적 주제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패배자가 이상적 사회를 건설함으로써 과격한 발상을 실현시키기도 한다.(‹› ‹여인들의 민회› ‹부의 신›) 

아리스토파네스는 지식인들이든(‹구름›) 시인들이든(‹개구리›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인들›) 혹은 허풍쟁이 군인들이든(‹아카르나이 구역민들›) 대상을 막론하고 위선적인 모든 것을 조롱했다. 바보의 어눌한 말을 통해 가장家長의 위선을 노출하기도 하고, 신체적 기능을 빗대어 사회 일반의 위선을 희화화하기도 한다. 속물적인 시민들이 허풍이 떠는 곳에서는 우둔한 사람의 단순성을 통해 지혜가 어떤 것임을 보여주고, 창자나 생식기, 성교 같은 본능을 대사에 포함해 이성적 존재로서 인간의 한계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규정하는 짙은 외설성은 단순한 음담패설이 아니라 허구의 외피를 두른 철학적 담론이기도 하다. ‹뤼시스트라테에서 섹스를 열망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상대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계략을 꾸미고,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인들에서는 여성들의 축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어 여자로 분장해 잠입하는 남자도 있다. 이럴 때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은 본능의 측면을 자유롭게 발설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사회적 구속으로부터의 일시적·상징적 해방의 계기를 마련해주고, 육체성에 대한 양면적 의식을 배설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한다. 


풍자와 희화, 인간의 교화불가능성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에서 핵심적 역할을 차지하는 또하나의 요소는 이와 같은 희극의 무대가 되는 아테네 자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도시의 다양한 제도와 아테네의 정체성, 시민들의 갈등 등을 폭넓게 다루었다. 소피스트들에 의해 소개된 새로운 교육 이론은 구름에서 왜곡되고 조롱된다. ‹에서는 민주주의의 자부심인 아테네의 재판체제가 속임수에 좌우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도시국가 아테네의 공동체 문화의 일부인 시인들과 문학작품은 지속적으로 패러디되고, 심지어 사회악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인들› ‹개구리›) ‹기사는 아테네의 정체성을 지지하는 민주제를 혹독하게 공격한다. 한편 는 시민들의 정치적 태도와 그것이 도시국가의 삶에 끼치는 영향을 주제로 취한다. 도시에서 도망친 의 두 시민은 열광적이고 제국주의적인아테네와 동일한 도시를 열광적이고 제국주의적으로하늘에 건설함으로써 현대작가 막스 프리쉬의 비더만과 방화범들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에서처럼인간의 교화불가능성을 증명한다

무엇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아테네의 막강한 권력자들을 날카롭고 자유분방하게 공격했다. 그의 희극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풍자와 비판의 대상이 된 인물은 페리클레스 사후 가장 강력한 지도자였던 정치가 클레온Kleon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기사에서 클레온을 당대의 선동가로 등장시킴으로써 정치가들의 화려한 언변과 속임수를 풍자한다. 한편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구름에서 현란한 언변가의 대표인 소피스트로 그려진다.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 역시 비극의 지나친 진지함을 풍자하고 젊은 세대의 부족함을 희화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종종 등장한다.(‹아카르나이 구역민들› ‹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인들› ‹개구리›) 그리스의 신들도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이 겨냥하는 풍자와 희화화의 제물이 된다. ‹평화에서 헤르메스와 포세이돈, 제우스와 같은 올림푸스의 신들은 탐욕스러운 인간과 똑같이 행동한다. ‹개구리의 디오니소스 신 역시 몸종인 노예와 서로의 정체성을 바꾸는 익살꾼으로 등장한다. 


아테네의 균형추,도발적이고 외설적인 


이렇게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에서는 부조리를 포착하는 감식력과 예리함이 풍자와 패러디, 환상적인 과장과 결합된다. 또한 정치, 경제, 문학, 철학, 수사학, 논리학 등 당대의 모든 삶의 영역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비극 공연과 달리 신분이 높은 자와 낮은 자, 신과 인간, 인간과 동물, 환상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 비유적인 것과 구체적인 경험을 제한 없이 뒤섞는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바흐친적인 의미에서 카니발의 계기였다. 이런 카니발적 직접성과 자유분방함은 극의 외부에 존재하는 폴리스 아테네의 전통 및 민주주의와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공연을 통해 제시된 문제들은 시민 관객들에게 사물에 대한 독자적인 시각을 허용했다. 또한 희극적 문제 극복 방식은 단선적인 결론의 제시를 떠나 하나의 대화 소재를 제공했다. 이 대화 소재는 비상식적인 주제의 선택, 다양한 견해의 노출, 풍자와 농담, 도발적이고 외설적인 풍자와 조롱 속에서 정신적 자유공간을 창출하는 데 기여했다. 동시에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은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화려하게 전시되는 아테네 공동체의 자기찬미에 대해 일종의 균형추 역할을 했다. 그것은 관객의 시선을 스스로에게 향하게 해 자신을 돌아보게 했으며, 공동체와 자신의 관계를 반추하도록 도왔다. 


신희극의 출현, 로맨스와 해피엔딩 


하지만 기원전 4세기 그리스가 마케도니아 수하에 들어간 이후 시민들은 더이상 자유롭게 지도자를 조롱하거나 개혁을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전제군주의 통치를 받게 된 그리스의 시민들이 만들고 즐길 수 있는 희극은 아리스토파네스류의 희극이 아니라 메난드로스류의 신희극이었다. 신희극에서 코러스는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에서 가졌던 중요성을 상실했고, 주제는 중산층 아테네인들의 일상생활로 옮겨갔다. 작품의 톤은 가벼워지고, 제작 면에서는 리얼리즘을, 인간 행동을 묘사하는 면에서는 양식화를 지향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신희극 시기에는 환상적 요소나 그로테스크한 육체성의 강조 같은 전통적인 카니발적 요소들이 동시대 사실주의에 밀리게 된다. 새로이 여가시간을 갖게 된 상층 및 중간 계급을 위한 희극의 강조점은 사랑, 로맨스, 결혼과 해피엔딩에 놓였고, 관객들은 사실적이지만 뻔한 플롯 속에 전형적인 등장인물들이 등장해 별다른 차이 없이 이 작품에서 저 작품으로 반복하는 삶의 면모를 보고 즐기는 데 그쳤다. 

희극의 구조 역시 변화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에서 코러스가 주제 및 시각적 효과, 구조, 관객과의 관계를 아우르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데 비해 메난드로스의 신희극 시기에 코러스는 단지 부수적인 오락에 이용되었을 뿐이다. 아리스토파네스 고희극의 구조적 핵심이자 희극의 서사극적 특성을 규정하는 대목으로서 작가의 입을 대신하는 코러스 파트인 파라바시스parabasis는 없어지고, 코러스는 극과 무관한 막간희극이 되었다. 극에서 코러스의 중요성이 감소한 것은 극장의 구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기존의 커다란 오케스트라는 그 규모가 축소되고, 무대 건물이 관객석으로 한층 더 가까이 감으로써 오케스트라 구역을 잠식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비극과는 달리 무의미하고 부조리한 것들 속에서 의미의 가능성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인간과 사회가 공유하는 책임의 정도를 물음으로써 일정한 사회적 감시 기능을 수행했다. 앞서 살펴본 현대 작가들이 희극이란 명칭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희극의 발생기에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이 구현했던 이러한 사회비판적인 기능미학에 대한 공감일 것이다. 


이정린, 고려대 독일어권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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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마 α] 아우구스티누스의 수학신학

중세 기독교의 기틀을 다진 교부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354-430)는 북아프리카 누미디아 주의 타가스테에서 태어나, 마다우라와 카르타고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그가 받은 교육은 중세의 7교과 체계에 따라 수학 4교과와 언어 3교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하학, 산술학, 천문학, 음악의 네 과목을 통해 수학을 배운 젊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특히 원한 것은 형이상학과 물리학의 영역에서 수학적 확실성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는 감각을 넘어선 수에 불변하는 진리가 있다고 여겼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세계가 책이라고 한다면, 수는 세계의 언어였다. 따라서 인간은 수를 이해함으로써 세계를 신의 작품으로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신념에 따라 아우구스티누스는 수학을 신학에 접목해 기독교의 진리를 설명하는 수학신학의 체계를 구축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수학신학

 

수를 이해하듯 진리로서의 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29세의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에 경도되어 있었다. 물질주의적 이원론을 주장하는 마니교에서 진리를 배울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설명의 일관성과 타당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마니교의 한계를 파악하고 등을 돌리게 된다. 이때 그는 수학의 지식을 통해 마니교의 오류를 증명해냈다.

 

그러나 동지와 하지, 춘분과 추분, 일식과 월식 등에 대해서 마니가 쓴 내용은 내가 자연 철학자들의 책에서 배운 내용과는 달리 타당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나에게 마니가 기록한 것을 믿으라고 강요하였지만, 그 내용은 내가 수학적으로 계산해보고 내 눈으로 관찰해본 것과는 전혀 맞지 않고 아주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 『고백록V. 3. 6

 

386년의 회심 이후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학파의 학문을 도구로 활용해 신학논저를 저술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계보상 피타고라스의 9대 제자에 해당되는 플라톤은 피타고라스의 수학과 신학을 계승해 자신의 사상 체계를 전개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피타고라스에서 플라톤으로 이어지는 수학과 신학의 유산을 물려받아 기독교에 접목하는 창의적 변환을 시도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수의 법칙과 진리는 신체의 감각기관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것은 대신 이성을 가진 모두가 공통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수의 의미는 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성서의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

 

7 더하기 310입니다.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렇습니다. 7 더하기 310이 아니던 때는 없었습니다. 7 더하기 310이 아닐 미래도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수의 불변하는 진리가 나에게 그리고 이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 『자유의지론II. 8. 21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신은 수를 사용하여 세계를 창조했다. 또한 모든 수는 신으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인간은 단지 수와 수의 규칙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수는 그것을 산출한 신에 대한 지식을 제공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즉 수는 영원한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 마음의 능력을 알려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수를 이해하는 방식이, 인간이 영원한 진리로서의 신을 이해하는 것에 대한 유비적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지혜는 수로부터

수는 지혜로부터

올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서해석학을 다룬 기독교 학문론에서 수에 대한 무지 때문에 성서의 많은 신비가 풀리지 못하고 있다고 논한다. 성서를 깊이 있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수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며, 인간은 이 세계 속에 있는 수의 질서를 통하여 그 너머에 존재하는 신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지혜와 관련해 성서와 수의 관계에 주목한다. “성서에서도 지혜에 수가 결부되어 있음이 우연은 아닌 듯합니다. 거기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내 마음을 다하여, 알고 숙고하고 헤아리기로 지혜와 수를 찾아 돌아다녔노라.’”(자유의지론II. 8. 24)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수학은 신을 이해하기 위한 지식의 첫 단계이며, 지혜는 그 마지막 단계였다. 즉 수학과 신학의 연속성은 지혜 내에서 발견된다.

 

성서에도 지혜를 가리켜 말하기를 지혜는 세상 끝까지 힘차게 펼쳐지며 모든 것을 훌륭하게 다스린다고 했습니다.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펼쳐지는 저 능력이 바로 수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훌륭하게

다스리는 능력은 지혜라고 불립니다. 결국 둘 다 단일하고 동일한 지혜를 이룹니다.

— 『자유의지론II. 11. 30

 

지혜는 수로부터 올 수 있으며 수는 지혜로부터 올 수 있다. 즉 지혜의 수와 수의 지혜는 동일하다.

한편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수는 신의 무한성을 증명하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그는 먼저 모든 수의 집합즉 전체 자연수의 집합이 갖는 무한성을 인지하고, 나아가 신을 모든 수를 알고 있는 존재로 정의한다. 그는 신의 지식도 수의 무한을 포함하지 못한다는 기존의 주장을 반박한다.

 

그분이 모든 수를 알고 계심을 의심하는 것은 절대 불가합니다. 시편에서 노래하고 있듯이 그분의 지식은 무한합니다.’ 비록 무한을 셀 수 있는 수는 없지만, 수의 무한성은 신이 파악하실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지식은 무한합니다.

— 『신국론XII. 18

 

이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가 계승한 피타고라스- 플라톤적 전통과 차이를 보인다.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의 수학에서 무한또는 무한의 수는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되었다. 왜냐하면 무한은 질서의 핵심을 이루는 비례형상경계가 없는 혼돈의 상태라고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은 무한보다는 유한과 관련된 존재로 해석되어야 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수학적 무한을 신학적 무한과 연결지음으로써 무한에 새로운 긍정적 의미를 부여한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수학적 우주에서, 신은 세계의 유한성을 초월하는 자유로운 존재이자 무한한 존재가 된다.

 

일부는 완성된 실현상태로

일부는 미완성의 가능상태로 태초에

창조하셨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비롯한 여러 저서에서 창세기6일 창조에 대한 새로운 수학적 해석을 제시한다. 어떤 수의 약수가 존재하고, 약수의 곱과 약수의 합이 일치될 때 그 수를 완전수라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최초의 완전수*6이 완전성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즉 창조의 완전성을 표현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표현이 6이라는 수이기 때문에 성서에서 6일을 창조의 기간으로 잡았다고 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수학신학적 해석에 의하면, 창조가 이루어진 6일은 태양의 존재를 전제로 한 태양계의 6일과는 다르다. 만약 태양이 창조된 이후의 6일이라면 그것은 창조의 완전성을 의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의 6일은 문자 그대로가 아닌 은유적 방법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논한다.

 

가변적 운동을 가리켜 최초의 6일 혹은

*  61, 2, 3을 약수로 가지고, 이 세 약수를 더한 값과 곱한 값이 6으로 일치하는 완전수이다.

날마다 아침과 저녁이 언급됩니다. 신이 이 6일 동안 만든 모든 것이 6일에 완성됩니다. 그리고 제7일에는 크나큰 신비를 담고 있는 신의 휴식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6일 혹은 7일이 어떤 양상을 갖는지 우리가 생각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우며 말로 표현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7일이라는 저 순서가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 『신국론XI. 6

 

은유적 해석을 통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저녁이 없는 날로 서술되고 있는 제7일에 대한 해석의 난제 역시 모순 없이 해결할 수 있었다. 즉 저녁이 없는 제7일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원히 해가 지지 않는 시간을 의미하며, 신의 거룩한 날이 영원히 지속됨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날짜가 된다.

한편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의 질서에 있어 논리적으로 충돌가능성이 있는 다음의 두 가지 사건에 주목한다.

 

(1) 만물이 태초에 동시에 창조된 사건

(2) 다수가 태초 후에도 연속해서 발생하며 존재하는 사건

 

그렇다면 신의 창조는 동시 창조인가, 아니면 6일 창조인가? 창조의 완전성과 창조의 연속성이 충돌하는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생물학적 모델을 도입한다. 그것은 하나의 씨앗이 발육하고 성장하여 나무가 되는 모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신은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면서 일부는 가능상태potentiality’로 창조했다. 그리고 적절한 시간과 환경에 따라 가능상태가 실현상태actuality’가 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창조를 무로부터의 동시 창조creatio ex nihilo,’ 그리고 가능상태로부터 실현상태로의 연속 창조creatio continua’로 구분하여 해석한다. 세계의 일부는 태초에 완성된 실현상태로 창조되었고, 다른 일부는 태초에 미완성의 가능상태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창조의 법칙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씨앗법칙rationes seminales’이라고 부르며,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잠재되어 있는 비밀의 수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어떤 것은 생명체 전체의 잠재되어 있는 비밀의 수를 받아서 후손으로 발생합니다.”(참된 종교XL. 74)

최초의 창조 이후 생명체가 발생하고 변화하는 과정은 잠재되어 있는 비밀의 수가 지닌 질서에 따라 일어난다. 존재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수, 즉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능상태의 수인 이 수를 아우구스티누스는 씨앗의 수라고도 표현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씨앗법칙은 다음과 같이 수학적으로 요약될 수 있다.

 

변화

씨앗(가능상태) 나무(실현상태)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에 의하면, 씨앗은 신의 창조물이고 나무도 신의 창조물이다. 이것은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는 주장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공헌은 씨앗이 나무가 되는 변화라는 과정을 신의 창조로 해석한 것에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씨앗과 나무라는 대상을 넘어서, 씨앗과 나무를 연결하는 함수를 신의 창조 작품으로 새롭게 정의한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씨앗법칙은 신이 창조한 우주의 변화의 법칙이자 수학적 인과법칙을 의미한다.

이 변화의 함수를 논리학의 용어로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P1(seed), P1(tree)와 같은 P1은 한 대상의 속성property을 다루는 1차 술어이다. 한편 P2(seed, tree)로 표현할 수 있는 P2는 두 대상의 관계relation를 다루는 2차 술어이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의 피조물이 가지는 속성을 설명하는 창조의 1차 술어 즉 P1을 넘어서서, 두 피조물의 변화 관계를 설명하는 창조의 2차 술어 P2를 구사한다. 이것이 신과 창조에 대해 새로운 차원의 논리적 술어를 부여한 아우구스티누스 수학신학의 중대한 공적이다.

 

세계가 아름다운 것은

그 안에서 수가

율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학적 법칙에 의해 창조된 이 세계에서는 물체의 형상forma’ 역시 수로부터 도출된 결과다. 즉 물체의 형상은 수에 귀속되는 만큼 존재를 가진다.

 

하늘과 땅, 바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십시오. 저 위에서 반짝이는 것이든지 그 아래에서 기어 다니거나 날아다니거나 헤엄쳐 다니는 것들을 바라보십시오. 그들이 형상을 지닌 것은 다름 아닌 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서 형상과 수를 제거해 보십시오. 그들은 무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를 주신 분에게서가 아니면 누구에게서 존재를 받았겠습니까?

— 『자유의지론II. 16. 42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술 속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찾을 수 없다고 논한다. 예술 속에 있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 아니라 오직 . “예술가는 수를 지니고 있으며, 그 수에 자기 작품을 맞춥니다. 작품을 창작함에 있어서 손과 연장들이 움직이지만, 내면에서 비추는 수의 조명을 받아서 움직입니다.”(자유의지론II. 16. 42)

이렇게 해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수학은 신학이라는 공간을 거쳐 미학으로 연결된다. 모든 수가 신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면, 신이 부여하는 아름다움 역시 수로부터 도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형상을 갖춘 육체의 아름다움을 바라보십시오. 수가 공간에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육체의 동작에서 보이는 아름다움을 바라보십시오. 수가 시간 속에 율동하고 있을 것입니다.

— 『자유의지론II. 16. 42

 

현우식, 호서대 기독교학과 과학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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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고통과 침잠] 나환자와 머, 머 뭇 거림

사도바울은 신이 끝내 고쳐주지 않는 자신의 질병을 육체의 가시라고 불렀다. 이미 받은 은혜 로 충분하다는 것, 육체의 가시는 온전해지기 위한 성장판이라는 것을 근거로 신은 자신의 침묵을 합리화한다. 사도바울은 이를 수용하고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며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내가 약할 때 곧 내가 강하기 때문이라.”

사도바울로부터 그럴듯한 은유와 우아한 역설을 걷어내면, 간질 혹은 안질이라는 추한 고통이 도사리고 있다. 이 헐거워진 육체의 단면은 물질의 집결체로서의 자아를 의식하게 하는 계기로, 땅으로 허물어질 미래의 소멸을 상기시키는 전언으로, 미루어 타자를 헤아리게 만드는 상상의 접점으로 기능한다. 이는 고통이 즉각적·즉물적·생리학적 현상으로 출력됨에도 불구하고 죄의 윤리와 숭고의 미학을 아우르는 넓은 지평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고통의 문제가 제대로 해명된 적이 있었던가?

고통이 임하면 즉시 코기토라는 주권을 빼앗기고 수동태형의 동사로 전락해야 하는 인간이 고통에게 설정한 위치는 대척점이었다. 고통pain의 언어학적 기원은 poena’이다. 의학은 수술로 고통을 제거한다. 종교는 고행으로, 예술은 도취로 그것을 넘어서고 망각한다. 고통을 승인하는 철학조차도 선을 추인하는 필요악으로서의 도구 이상의 자리는 내어주지 않는다.

사도바울의 신이 육체의 가시정도가 아니라 형벌에 가까운 고통을 경험하기 위해 하강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고통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2차원의 고정점으로 고통을 결박할 것이 아니라 아래로 향하는 그것의 방위와 지향을 먼저 가늠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아래로, 아래로, 인간에게 침투한 고통이 더불어 존재의 윤곽을 허무는 동안, 인간은 통증 이외의 모든 것을 잊고 자연이라는 보편으로 수렴되어간다. 그러나 이 고독한 침잠沈潛은 역으로, 언어와 기호라는 평생의 질고에서 나를 탈출시키는 기제,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나에게만 유효한 나로 나를 규정하게 만드는 은밀한 명명의 제의일지도 모른다.

YGSJ

 

나환자와 머, 머 뭇 거림

우리는 누군가의 고통이 나에게 위로가 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타인의 고통이 위로가 되는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느냐고 묻는다면, 그 물음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머뭇거린다. 그러한 위로가 나의 삶을 지켜준다면 너무나도 서글퍼지기 때문일 것이다. 서양의 중세 시기, 나환자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는 어떤 머뭇거림이 있었다. 그 머뭇거림의 역사적 궤적을 조용히 따라가보자.

 

나환자, 불결한 은유

 

중세의 성직자들은 나환자를 하느님이 특별히 선택한 자들이라 여겼다. 그러나 중세 후기로 접어들면서 나환자는 기독교 사회에서 점차 죄인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중세교부들은 나환자가 죄인인 동시에 공덕이 있는 자이며, 신에게 저주받은 동시에 축복받은 자라고 말했다.

한편 그들은 영적인 타락을 나타내는 은유로 나병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에서는 나환자수용소에 수용되지 않는 떠돌이 나환자가 있었는데, 이들을 지칭하는 카고cagot’라는 단어는 더럽고 불결한 사람을 의미하는 은어로 사용되었다.

나병은 또한 문란한 성생활에 대한 징벌의 의미를 가졌다. 15세기의 한 사료는 만약 나환자와 성관계를 갖는다면, 당신은 나환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환자는 갈보집과 목욕탕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나아가 나병과 성병이 연결되는 맥락에서 여성이 잠재적으로 부도덕하고 열등하다는 견해를 강화시켜, 여성을 나병 감염의 잠재적 진원지로 낙인찍기도 했다. 12세기에 씌어진 베룰Béoul트리스탄의 이야기에는 나환자 대장이 나오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졸데를 저희들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공동으로 그녀를 소유할 것입니다. 병은 우리의 욕정에 불을 당깁니다.”

 

나환자, 오염된 이교도

 

나병은 이단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초기 기독교 교부시대 때부터 교부들은 이렇게 말해왔다.

너는 나환자다. 너는 이단에 빠져 있고 성직자의 판단에 의해 종파로부터 배제되었으며 법에 따라 머리를 깎고 헌옷을 입는다. 너의 몸은 오염되고 더러운 옷으로 덮여 있다. 너는 네가 나환자이고 이단자이며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인식해야 하며 교회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홀로 살아야 한다.

실제로 이단이 나병처럼 퍼진다는 문장은 당시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1163년 잉글랜드에서는 이단자들을 색출하여 처벌을 내린 사건이 있었다. 이단자들은 옥스퍼드로 끌려가 그곳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음식과 거주지를 얻지 못해 추위 속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나환자, 낙수받이 괴물

 

노트르담 성당의 낙수받이 괴물들 가운데에 나환자가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신성한 성당에 이러한 괴물들이 있는 것은 이들이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악령을 쫓아내는 부적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환자에게도 그러한 역할이 주어졌다.

나병을 죄의 결과로 보는 사고는 기독교만의 전통은 아니었다.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는 나병이 죽음을 가져오는 신의 처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다. 오늘날 히말라야 지역에 있는 일부 힌두인들은 나병을 지나치게 비열했던 과거의 화신이 행하는 공격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나일강 상류의 잔데 사람들은 나병을 근친상간의 결과로 여긴다.

 

나환자, 살아 있는 시체

 

나환자들은 결혼이나 재산 등 세속적인 생활면에서도 제약을 받았다. 노르망디에서 나환자는 자신의 토지 수입을 가질 수 있었고, 에노에서는 유언을 통해 이를 처분할 수도 있었으나, 영국에서는 노르만 시대 이래로 상속에 제약을 받았다. 1200년 웨스트민스터 공의회는 나환자가 유서를 작성하거나 법정에서 변론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나환자들의 법적 특권 및 보호를 박탈하기도 했다. 교회는 나병으로 인해 결혼이 무효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나환자의 배우자는 자유롭게 재혼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는 사실상 나환자에게 결혼할 권리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격리의식이 있다. 이 의식은 12-13세기에 주로 행해졌으며, 이후에는 점차 상징적인 의식으로 바뀌었다. 우선 나환자가 사제의 인도를 받아 교회로 가면, 성직자들은 그에게 성수를 뿌린다. 이어 나환자가 자신의 죄를 고해한다. 사제가 미사를 집전하는 동안 그는 가대架臺에 얹은 검은 천막 밑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사제는 교회의 안팎에서 퍼온 흙 세 삽을 그의 머리 또는 발에 뿌리면서 이렇게 선언한다.

 

그대는 이 세상에서 죽은 거나 진배없느니라.

그러나 다시 살아서 하느님에게로 갈지어다.

그런 다음 나환자는 들판으로 끌려 나간다. 사제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금기 조항을 말해주면서 격리의식을 끝낸다.

맨발로 외출해서는 안 된다. 여행 중에 다른 사람이 그대에게 거는 말에 대꾸하지 마라. 누군가와 마주쳐서는 안 되니 좁은 길로 다니지 마라.

 

나환자, 나사로의 첫 글자

 

나환자들은 특정한 표식을 들고 다님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알려야만 했다. 릴에서는 작은 호른을 들고 다녀야 했고, 아를르에서는 건강한 사람을 위해 노래를 불러야 했다. 1424년 헨트 법령에 따르면 나환자들은 방울과 막대기를 휴대해야 했다. 의상에도 규정이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긴 옷을 입고 장갑을 착용해야 했으나 색깔과 길이는 지역마다 달랐다. 푸아티에에서는 하얀 옷을 입어야 했으며, 브뤼헤와 헨트에서는 회색 의복과 검은 모자, 장갑을 착용해야 했다. 한편 프랑스 북부 지역에서 나환자들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사로Lazarus의 첫 글자를 딴 L자를 적색으로 수놓은 회색 또는 흑색 의복을 착용해야 했다. 신발에는 방울을 달았고, , 방울, 캐스터네츠 등을 들고 다녔다.

 

고문당하고 화형당하고

 

나환자는 재앙이 있을 때 종종 희생양이 되었다. 1315-1318년 대기근 이후 유대인들과 나병환자들이 프랑스 전역에서 추적을 받았다. 그들은 샘물과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당시 이러한 혐의로 체포된 나병환자와 몇몇 연대기에 따르면, 물을 오염시키기 위해 사용된 독은 파충류의 혼합물이었다고 한다. 이는 악마의 사주를 받은 마녀의 이미지를 연상시켰다.

파미에의 주교 자크 푸르니에는 종교재판 법정에서 나병환자 기욤 아가사의 놀라운 고백을 들었다. 무장한 무어의 기사들이 독이 든 큰 항아리를 비밀리에 보르도에서 툴루즈까지 보냈다는 것이었다. 로데브의 주교 베르나르 기는 케르시의 카타르파에 대한 종교재판을 추적하다가 기욤 아가사의 사건을 듣게 되었다. 그는 1321년에 일어났던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1321년 프랑스 왕국의 건강한 사람들에 대한 나환자들의 사악한 음모가 발각되어 무산되었다. 실제로 심신이 건강치 못하면서 사람들의 안전을 해치기 위해 음모를 꾸민 나환자들은 개천, 샘물, 우물에 독약과 감염된 물질을 풀고 미리 준비한 가루약을 (물에다) 섞어 넣음으로써 식수를 감염시켰다. ······말해도 믿어지지 않을 일은, 그들이 도시와 성채의 영주가 될 야심을 품고, 자기들끼리 통치권과 직위를 이미 분배하고, 만일 거사가 성공하면 여러 지방에서 군주와 백작, 남작 같은 칭호를 나누어 갖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성난 민중들이 나환자들을 집에서 불태워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푸아티에 출신의 한 나환자가 이 음모에 유대인이 개입했다고 자백했고, 그의 자백이 국왕 필립 5세에게 보고되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라나다의 이슬람교도 국왕과 바빌론의 술탄이 이 음모를 지원했으며, 음모가 성공할 경우 나환자들에게 부와 명예를 주겠노라고 약속했다는 사실이었다.

큰 충격을 받은 필립 5세는 검거에 나설 것을 명령했다. 음모에 개입했다고 자백한 나환자들은 모두 산 채로 화형을 당했고, 순순히 자백하지 않는 나환자들에게는 고문이 가해졌다. 죄가 확정된 나환자의 재산은 국가가 몰수했다. 1321년에 벌어진 이 사건은 당시 사회의 주변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내몰리고 축출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추방되고 격리되고

 

나환자에 대한 중세의 해결책은 추방과 격리였다. 789년 샤를마뉴의 법령집 29조에는 나환자를 맨손으로 만지지 말라는 조항이, 36조에는 나환자들과 다른 사람들이 섞이지 않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나환자들의 실제적인 격리가 12세기 이후에야 점차 실행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259년에 르퓌 근교의 브리브에 위치한 나환자수용소의 규약에는 나환자들이 공기와 숨결로 사람들을 감염시키므로 주의해야 한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1371년 샤를 5세는 파리에 주소를 두지 않은 나환자의 추방을 명령했다. 이러한 법령은 이후 16세기 초인 1502년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나환자는 신이 내린 최대의 형벌을 받은 자들로서 사회를 오염시키는 존재들로 비추어졌고, 그들에 대한 일차적인 조치는 추방이었다.

 

나병, 신으로부터의 선물

 

교회는 나환자의 격리를 주도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정심을 가지고 이들을 대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실제로 중세의 많은 성직자들은 나환자를 돌보는 것을 매우 구체적인 선행의 한 형태로 간주했다. 1264년 샤르트르의 주교는 그랑보리유의 수도원장에게 수녀들이 나환자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1239년 투르네의 주교는 이 병이 신으로부터의 선물이라고 주장했으며, 루이 7세는 라자루스의 나병에 대해 그들은 신체의 질병으로 짐을 지고 있지만 그 때문에 영혼의 건강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캔터베리 이야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만약 이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비난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비난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이 고통은 신의 정의로운 사자가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연민의 상징이었던 나환자수용소는 교회에 의해 수도원처럼 운영되었다. 많은 수용소가 성 나사로를 수호성인으로 모셨는데, 이로부터 나환자를 지칭하는 나사로와 나환자수용소를 지칭하는 나사로의 집이란 말이 유래했다. 나사로는 예수에 의해 죽음에서 되살아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나환자였다는 근거를 성경에서 찾을 수는 없지만, 전통적으로 그는 나환자로 여겨졌다. 스칸디나비아와 독일의 나환자수용소는 대개 성 조지를 수호성인으로 삼았다. 그가 퇴치한 용은 나병을 상징했다.

 

머뭇거림, 최소한의 윤리

 

서양 중세사회에는 분명 나환자에 대한 머뭇거림이 있었다. 하지만 16세기를 지나면서 사회는 머뭇거림의 태도를 서서히 상실해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약자에 대해 더욱 가혹해졌고,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나병환자, 빈민, 광인 모두가 더욱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당했다. 부와 이성, 문명, 예절이라는 단어는 오직 강자들의 것이 되었고, ‘사회적 다위니즘의 정당성은 제국주의로, 게르만족의 우월성은 파시즘으로 드러났다.

권력은 항상 누군가에게 쏠리고 누군가는 이로부터 배제된다. 그리고 권력으로부터 배제된 자들 또한 그들의 세계 안에서 권력다툼을 벌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최소한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머뭇거림이 아닐까. 끝내 없어지지 않는 것, 우리의 양심을 닮은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안에 내재된 최소한의 윤리, 머뭇거림이다.

 

 

이성재, 충북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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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세상의 모든 집] 영혼의 집 - 어디서 왔는지 되돌아보라

 

영혼의 집

어디서 왔는지 되돌아보라

 

경계의 집

돌이켜 보면, 생은 온통 집에 머물기와 집을 나오기였다. 집을 나오면 산으로 들어갔고, 산을 내려오면 집으로 되돌아갔다. 일상의 터전인 집은 잠시 머무는 곳이었고, 집 바깥의 산은 자유의 집과 같았다. 집에서는 뭐가 되고 싶은 바가 없었지만, 산에서는 산에 관한 인문적 성찰도 했고, 등반을 위한 훈련과 실천도 꽤나 했다. 그럴수록 산은 머무는 시간이 많은 오래된 집처럼 여겨졌다. 오래된 집은 속삭이기도 했고, 침묵하기도 했다. 젊은 날 그 곳에서 솟아오른 봉오리와 같이 벙어리로 있었다.

자기 자신의 주인인 자는 자유롭다는 말은 산에서 얻은 깨달음이다. 가두리 양식장 같은 집을 나오면, 몸은 길을 따라 걸었고, 길이 끊긴 곳에 이르러 야영이나 가출로 이어졌다. 집에서 바깥으로 나오는 가출 즉 문밖, 아웃도어의 삶은 떼어놓기, 도망치기, 소속되지 않기, 말하지 않기, 꿈꾸기, 이동하기와 동의어였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이탈하는 유혹이다. 동양에서는 이를 도야陶冶라고 했다. 도야는 집 안에서 바깥으로의 이동이되, 안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새로운 관계, 그 공명이다.

집의 종류는 참 많다. 사는 집, 머무는 집, 짓는 집 등. 집에서 나오는 가출은 불편한 것, 독립적인 것, 복잡한 것, 여기를 버리고 저기로 가는 은밀한 행위이다.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익명적 존재가 되는 자발적 불안이다. 영국의 산악인이며 당대 산악문학의 으뜸이었던 프랑크 스마이드처럼, 산을 영혼의 집이라고 크게 말하기는 뭐하지만, 산과 같은 집은 훈장과 아주 먼, 초대하고 초대받는 것이 아닌, 주고받는 것이 아닌, 예시나 전형이 있는 곳이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그럼에도 아주 먼 곳에 있는 집, 낯선 곳에 자리 잡은 집으로 가고 싶어 한다. 아주 힘들게 홀로.

영혼의 집과 같은 곳으로의 외출 혹은 가출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그것들과 등지면서 과거화되고, 비사회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시선에서도 벗어나는 것이다. 집이 집단성을 상징한다면, 영혼의 집은 자기 자신과 분리이고, 비집단적이라서, 사회적 동맹과 거리를 두는 행위의 집이기도 하다. 집 바깥, 영혼의 집은 줄기, 가지, 덩굴처럼 얽히기보다는 가벼운 포자처럼 떠다니는 것에 가까울 듯하다.

 

왜곡된 집

오늘날 집의 소유에 집착하는 것은 광포 수준이고, 집 바깥으로 가출하고자 하는 열의는 폭풍 수준이다. 거기에 분노나 좌절 혹은 자기 자신의 외면과 존재의 가벼운 확인 같은 것들이 숨어 있다. 과도한 노동으로 육체를 자기 삶의 노예로 삼아야 하는 경쟁사회의 가해자, 피해자들에게 집의 소유와 확장은 위로이고, 집 바깥으로의 가출은 유혹이고 자유로운 영혼의 학습일 터이다. 그 실천과정에 자기 존재감의 확인과 자발적 성취감이 있다. 한편 집 바깥의 산에 오르는 행위를 일상적인 삶의 굴욕감을 방어하는 것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난이가 높은 산에 올라 자기 자신의 존엄을 회복하려는 이들도 같은 맥락이다.

도시 한복판에서 전문 등산복을 입고 다니는 이들과 산에서 요란한 장비를 착용하고 오르는 이들에게서 굴욕감과 존엄 사이를 오고가는 불안한 심리를 엿볼 수 있다. 일상적 삶과 사회 제도 속에서 존재가 외면되었거나 거부당했던 경험, 존재가 누락되어 상처 입은 이들이 집에서 나와 영혼과 같은 산으로 스며들고, 높은 곳에 오르려고 했던 역사는 오래되었다.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깊은 산에 집을 짓고 살았던 화전민들의 삶도 그러하다. 화전민들은 산에 지은 영혼의 집에서 자기 자신의 존엄을 깨달았고, 자연과 같은 타자와의 관계의 거룩한 본질을 수행했고, 건강한 내면과 외면, 자신의 삶의 독립을 가능하게 했다. 삶의 정신사와 같았던 이런 집은 정부의 몰이해와 강제로 철거된 화전민의 존재처럼 한꺼번에 사라졌다. 정부는 1968년에 화전정리에 관한 법률을 제정 공포했고, 1980년에는 복지사회 건설의 거울이란 이름을 내세워 <화전정리사>라는 두툼한 보고서를 자랑스럽게 출간했다.

사유의 집

oikos, eco 바깥이 광장이다. 타자와 함께sym 먹기posium는 공동체가 생출한 가장 고귀한 이념에 속한다. 집이 일상의 유산이라면, 공동체는 정신의 유산일 터이다. 가출의 역사는 공동체의 역사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집을 인간의 육체를 담는 의복과 같은 것으로 본다면, 육체의 환대인 집짓기는 일상적 삶의 궁극인 셈이다. 오늘날 건축가들은 구멍이 많은 집짓기 즉 다공성 건축을 말하는데, 이는 집 바깥을 집 안으로 들이려는 건축으로, 비사회적 자연을 포용하는 건축의 육화이다.

집을 짓고, 집에 살면서 성장하고, 집 바깥에서 타자와 관계 맺고, 삶과 세상을 공부하는 도야는 오래된 교육의 증좌였고, 인문적 성찰의 기원과도 같았다. 정신의 주관적 형성과정, 그 전체를 표현하는 것이 철학이나 문학, 예술의 원천이라면, 집 바깥은 성장, 성숙, 사유를 위한 기조일 것이다. 일차적으로 집에서 집 바깥으로와 그 반대인 회귀는 모두 제자리로 가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떼어놓는 행동이다. 이때 남긴 기억과 흔적 등은 사는 동안 지속된다. 논어(학이편)에서는 어디로 가려는지 알고 싶거든, 어디서 왔는지 되돌아보라告諸往而知來者라고 했다.

대략 집은 갇힌 가까운 공간이고, 집 바깥인 공동체 사회는 익명적 존재가 되는 먼 공간이다. 집 안이 안주의 공간이라면, 집 바깥은 놀라움을 경험하는 공간이다. 여행처럼. 집에서 집 바깥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행위는 일상의 삶과 공동체 사회를 이해하는 기초이다. 집과 집 바깥이 삶에 관한 근원적 사유 장소가 되는 바는 여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집과 같은 과거에 대한 근거를 살피는 해석이다. 집을 기점으로 자기 자신을 과거와 현재 사이에 놓는 일에서 삶과 세상에 관한 적극적인 관심, 본질적인 재미가 생성된다. 집과 같은 과거의 탐구가 곧 개인의 역사의 출발이고 기원이다. 과거의 해석은 과거로의 후퇴가 아니라 과거를 폭발시키는 일, 과거를 현재로 불러들이는 일이고, 이것이 영혼의 집을 향하는 가출이고, 여행이고, 유랑이다. 희랍에서는 가출을 좋아해서 집을 나와 길과 들 그리고 산으로 가는 이들을 멧돼지에 비유했다. 혼자인 자, 혼자인 돼지, 홀로 있기를 좋아하는 이를 성숙한 사람, 교양인이라고 불렀다.

 

고향인 집

오늘날 집과 집 바깥을 탐닉하는 풍경은 윤리와 도덕의 반영이되, 부조리이다. 집 바깥으로의 이동이 새로운 삶과의 접촉이 아니라, 시장과의 접촉, 유행의 노예가 되는 길목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집과 집 바깥이 과거가 아니라, 이익과 같은 현재 혹은 미래로 향하고 있다. 도시로 내려오는 미쳐버린 멧돼지들을 눈여겨보면 좋겠다. 개체수가 너무 많은 멧돼지들, 제 삶의 척도를 잃고 헤매는 멧돼지들, 보편적 판단능력을 잃어버린 멧돼지들, 교양을 잃어버린 멧돼지들…… 가출한 멧돼지들은 즉흥적인 흥분으로 집을 빠져 나오는 이들과 비슷하다. 감정은 서사적 길이와 폭을 지니는 반면, 흥분은 깊이를 제거한다고 했다. 감정은 이야기가 있는 것이고, 흥분은 이야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산속 집을 떠나 도시로 내려와 날뛰는 멧돼지들은 대부분 흥분한 멧돼지들이다.

집의 소유와 더불어 영혼의 집을 향한 뽐내는 나들이는 흥분의 산물이고, 산업화에 예속된 결과이다. 삶의 모든 것이 세상 구석구석 표준화되고 복제되고 있다. 먹는 것, 입는 것, 집의 형태, 육체, 듣고 보는 모든 감각들, 그리고 집 바깥으로 나가는 아웃도어 산업도 규격화되었다. 모두가 하나가 된 것이지만, 이도 저도 아닌 몰개성이 된 것이다. 집뿐 아니라 우리들 모두가 물화된 타자인 셈이다. 아웃도어 산업은 향수병과 같은 고향 상실을 팔아먹으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산업이다. 집과 고향의 과거성보다는, 전원에 어울리지 않는 현대식 집짓기처럼, 화려한 옷과 장비를 내세운다. 개인은 근원인 집과 고향, 집을 나오는 가출의 의미와 오히려 단절된다.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비슷한 집에 살면서 자기 자신과 집 그리고 고향을 회복하려는 제의적이고 정화적인 광기 속에 빠져들고 있다.

플라톤은 그리스 교육을 옛 교육라고 했다. 영혼의 집을 위한 자유와 유희에 중심을 둔 교육이다. 그 당시, 아버지가 이런 것들을 아들에게 배우도록 하지 않았다면, 그 아들은 아버지를 노년에 부양할 책임이 없다고 책에 쓰여 있다. ‘옛 교육의 장으로서 집과 집 바깥 즉 신체를 위한 집 바깥, 영혼을 위한 음악교육을 하는 곳이 여가란 뜻을 지닌 스콜레schole, school’이다.

최근에 집을 나와 길을 걷는 것이 유행이다. 프랑스에서 스페인을 거쳐 포르투갈에 이르는 산티아고 길, 네팔과 부탄 그리고 티벳을 잇는 히말라야 트레킹, 차마고도, 히말라야 소금장수 카라반 길, 코르시카 섬 종주길, 안데스 산맥, 로키 산맥 트레일이 그 예이다. 이에 관한 영화들, 예컨대 <와일드>도 개봉되었다. 우리나라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옛길을 복원하는 것도 늘어나고 추세다. 북한산, 지리산, 제주도 둘레길, 영양 보부상 길, 설악산, 대관령 옛길, 영남대로 옛길이 그러하다.

영혼의 집

집이 고향이라면, 집 바깥은 타향이다. 집 바깥인 고향은 떠나옴이고, 집 안인 귀향은 들어옴이다. 그러나 고향 파괴, 고향 상실이라는 말을 하자면 정반대가 된다. 가출은 떠나온 고향으로의 되돌아감 즉 귀향이 된다. 이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돌아가는nostos 아픔algos, 향수nostalgie라는 단어가 생겼을 것이다. 가출은 집 바깥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제 존재와 삶의 근원을 발견하고자 하는 반성의 행동, 회귀이다. 가출이 시작된 곳은 집이 아니라 고향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고향을 떠난 이방인들의 세상이 디아스포라이다. 세계 등반사에 기록된 알피니스트들, 음유시인들, 떠돌이들은 이들의 후예이고 현존이다. 영혼의 집은 고향이다.

집 바깥을 세상이라고 말하는데, 한국 근대시의 백미인 백석의 시처럼, 서럽고 고된 삶이 도피하는 공간이 영혼의 집인 산이기도 했고, 발고랑처럼 굴곡진 제 삶을 달리 꿈꾸기 위해서 현실을 버린 공간도 산이었다. 이상향을 꿈꾼다고 하지만, 현실 안에서의 한계와 불행을 확연하게 알게 되는 절망의 끄트머리가 산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현실의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집에서 산으로, 산에서 그것을 두 배 이상 느끼는 은둔이나 내면으로의 가라앉음은 가출의 제 모습이고 역설이다. 고독이 자유와 등가라고 말하는 것은 은둔의 최고값을 뜻한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처럼, “가난한 내가…… 눈이 푹푹 쌓이는 밤…… 산골로 가는 집 바깥으로의 탈출은 영혼의 집 속으로의 은둔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은둔이 사라지고 있다. 은둔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무시하는 것, 기억이 말하는 것을 듣는, 자취뿐인 옛길로 가는, 스스로 시간으로부터 이탈하기이다. 그리고 관계, 교류 혹은 약속 같은 것에서 벗어나기, 그런 것들로부터 노예가 되지 않기이다. 개별적 존재에서 공동체적 존재로, 다시 공동체적 존재에서 개별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바흐Bach가 흐르는 강을 뜻하듯……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른다.

 

안치운

호서대 연극학과 교수,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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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세상의 모든 집] 언어의 집- 나는 아직도 여행 중입니다

언어의 집 나는 아직도 여행 중입니다 



과거에 할례는 소년이 성인 남자로 거듭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성년식의 일부였다. 옛날 사람들은 자기 몸의 일부를 신에게 바치는 할례 의식을 신이나 악마가 주관한다고 믿었다. 그 의식은 신이나 악마의 소리라 여겼던 천둥을 재현하는 악기 소리를 동반했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악마를 의미하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을 읽으면서 영적인 성년식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즈음 나는 카프카의 돌연한 출발을 접하였다. 


나는 말을 마구간에서 끌어 내오도록 명했다. ······멀리서 트럼펫 소리가 들려 나는 하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주인나리, 말을 타고 어디로 가시나요?” 

모른다하고 나는 말했다. “다만 여기를 떠나는 거야. ······끊임없이 여기에서 떠나는 거야. 그래야 나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네. ······여기에서 떠나는 것, 그것이 나의 목적지일세.” 

나리께서는 어떤 예비 양식도 갖고 있지 않으신데요.” 그가 말했다. 

여행이 워낙 긴 터라 도중에 무얼 얻지 못한다면 나는 필경 굶어 죽고 말 것이네. 예비 양식도 날 구할 수는 없을 걸세. 실로 다행스러운 것은 이 여행이야말로 정말 엄청난 여행이라는 걸세.” 


소설 속 트럼펫 소리가 내게는 성년식을 알리는 천둥소리였다. 그 소리가 가르는 장막의 틈새로 세상이 한줄기 빛이 되어 너무도 생생하게 다가왔다. 진리는 손에 잡힐 듯했고 몸과 마음은 과도하게 각성되었다. 

나는 돌연한 출발의 주인공처럼 여행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지만 여행에 나서지 않으면 인생이 모두 무의미할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여행의 이름이 철학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훗날 엘리아데의 샤머니즘을 읽고서 당시 내가 겪었던 성장통이 신내림과 비슷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정말 신내림을 받거나 신을 본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신에게 감사했다. 나를 이 여행길로 이끌어준 것에 대해서. 그리고 이 엄청난 감수성을 벼락같이 내려준 것에 대해서. 

나는 세상을 경외심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 길에서 선각자들을 하나둘 만나게 되었다. 그들의 위대한 사상과 예술이 내 영혼의 양식이 되었다. 체험과 생각과 독서를 밑천으로 나름의 언어를 지어보았다. 서투른 언어로 지은 집은 보잘것없었지만 꿈과 열정에 몰입해 고독한 작업을 계속했다. 네루다의 에서 그때의 내 모습을 떠올려본다. 


그러니까 그 무렵이었다··· 시가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겨울에선지 강에선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도, 

침묵도 아니었다. 

······그때 무언가 내 영혼 속에서 꿈틀거렸다, 

열병 혹은 잃어버린 날개들. 

그 불에 탄 상처를 

해독하며 

난 고독해져갔다. 

그리고 막연히 첫 행을 썼다. 


헤세와 카프카를 처음 읽은 지 어언 40년이 흐른 지금도 당시 내 영혼을 일깨웠던 언어는 그 모습 그대로 작품 안에 간직되어 있다. 내 마음을 고양시켰던 작가들을 읽을 때면 행간에서 그때의 가빴던 숨결과 희열이 다시 느껴진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변하기나 한 것일까? 돌연히 출발했던 시작점에서 얼마나 멀리 온 것일까? 아니면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내가 걸은 철학이라는 길은 원래 늘 제자리를 맴돌게 되어 있는 것일까? 

그동안 많은 것을 보고 읽고 듣고 체험했다. 하나로 갈무리하기에는 다채롭고도 단편적인 소소한 성과들과 함께. 나는 대학 새내기들에게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모든 산을 오르라를 노래해주었다. 


모든 높고 낮은 산을 찾아 오르라. 

네가 알고 있는 오솔길을 따라서 

모든 시내를 건너 산을 오르라. 

무지개를 따라서 너의 꿈을 찾을 때까지. 


비록 모든 산을 오르지는 못했지만 내가 가는 오솔길에 놓인 시내와 산들은 비껴가지 않고 호기심 어린 즐거운 마음으로 건너고 올라보았다. 

언어의 집으로부터 가출하기도 했다. 수행자를 만나 그들로부터 생각을 끊고 언어에서 놓여나는 수행법을 배우고 익혔다. 작곡가를 만나 그들이 노래하는 언어 아닌 음의 무궁무진한 폭과 깊이에 공명했다. 경이로운 자연을 만나 그 말없는 침묵의 메시지에 귀 기울였다. 

그러나 읽고 쓰는 일을 영원히 멈출 수는 없었다. 수행과 음악과 자연도 언어의 집과 대립되어 보이지 않았다. 바깥 체험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더 집약된 언어를 쓸 수 있었고 다시 언어의 문을 나서면 세상은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 길의 끝에서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주변에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을 보았지만 스스로 어떤 명확한 결론에 도달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더 살고자 발버둥 치다 이승에서처럼 바삐 사라져갈 뿐이었다. 작별을 고할 틈도 없이. 

세상에 대한 가설적 결론들은 이미 넘쳐난다. 거기서 얻는 정보나 깨달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세상의 신비는 나의 이해를 넘어 영원히 고갈되지 않을 듯싶다. 여행의 끝에서 어떤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해도 괘념치 않는다. 무얼 바라고 떠난 것이 아니지 않는가. 

나는 신이 내게 준 시간이 다할 때까지 다만 이 순례의 길을 갈 것이다. 내세가 있다면 거기서도 무지개를 따라서 이 여행을 계속하련다. 그리고 벗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실로 다행스러운 것은 이 여행이야말로 정말 엄청난 여행이라는 걸세.” 


이승종, 연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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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세상의 모든 집] 기계의 집—그 기계는 내 기계다!

기계의 집
—그 기계는
내 기계다!

 

 

제대로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소련 노동 현장에서 인간은, 프랑스 학자

몽테뉴의 말대로, ‘결함이 많은 기계였다.

급격한 산업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뒤에도 소련의

공장에서 노동규율은 애초의 이상만큼 확립되지

못했다. 그 배경에는 계획경제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결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현실 사회주의에서

계획경제란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경제를 뜻한다.

소련 정도로 많은 수의 인구와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에서 중앙정부가 생산에 투여되는 모든 자원을

점검하고 정확하게 수요를 예측하기란 당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모든 공장은 계획에 따라

매월 생산목표를 달성해야 했지만, 생산계획이 제때

도착하지 않거나 필요한 원자재와 공구가 준비되지

않는 경우도 흔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월초에는 작업장을

배회하거나 개인적인 업무를 보다가, 필요한

원자재가 도착한 중순 이후에 몰아치기로 생산계획을

달성해야 했다. 또 필요한 기계와 원자재가 없는

경우 노동자들은 스스로 창의력을 발휘해 생산과정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노동현장에서 관리자는 업무에

태만한 노동자를 꾸짖고 벌을 주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의 자발성을 끌어내고 이들의 편의를

봐주어야만 생산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반복성과

규칙성, 상사의 지시에 대한 복종도 중요했지만, 이에

못지않게 자발성과 유연성, 임기응변이 생산계획을

달성하는 데 더 큰 힘을 발휘하곤 했다. 몽테뉴와

논쟁을 벌였던 데카르트라면, 인간은 영혼을 가진

기계이기에 기계보다 좀더 낫다고 말했을 법한

대목이다.

스탈린 시대의 가혹한 압제는 노동 현장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소련이 급격한 산업화를 이룩한

뒷면에는, 계획 달성을 위해 무리한 작업 지시를

내려 벌어진 사고라든가 대규모 수용소 노동 같은

어두운 측면이 존재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의 집권기를 거치면서

노동규율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는 많이 사라졌다.

1960년대 어느 탄광에서 파업이 발생한 일이

있었다. 소련에서는 극히 드문 파업의 발발에

KGB(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가 나와 조사를 벌였다.

노동자들은 정보기관의 조사에 두려워했지만,

KGB는 노동자들의 편을 들어 주었다. 파업이 있기

하루 전날이었다. 2교대로 근무하는 이 탄광에서

야간작업을 끝낸 노동자들이 샤워를 하려 했는데,

온수가 나오지 않았다. 제대로 씻지 못해 화가 난

노동자들이 옷을 갈아입고 퇴근을 하려는데, 이번에는

통근버스가 없었다. KGB는 노동자들의 불만이

일리가 있다고 보고, 사장을 다른 탄광으로 보내

일반 노동자로 일정 기간 근무하도록 했다. 그러니까

적어도 1960년대에는 초기와 같은 감시와 처벌이

상당한 정도로 완화되어 나름대로의 일상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 공장 현장이 돌아가는 방식은 레닌을

비롯한 혁명 시기 지도자들이 과학적인 생산방법이라

여겼던 테일러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구상과

실현의 엄격한 분리, 즉 경영자나 관리자가 구상하는

러시아혁명 직후인 1918, 레닌은 러시아인들이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의 국민들에 비해 노동자로서

결격이라고 탄식했다. 당시 러시아는 전체

경제활동인구 5천만 명 가운데 겨우 3백만

명가량이 공장이나 탄광에서 일하고 있던 상태로,

인구의 대다수는 농업이나 가내수공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제조업이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훨씬 못 미치는 것도

문제였지만, 제조업이 요구하는 노동규율에 익숙한

사람이 적다는 것도 커다란 과제였다. 따라서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낙후된 러시아 경제를 끌어

올리려면, 공장을 많이 짓는 것 이상으로 그 공장에서

일할 노동자들에게 노동규율을 학습시키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아마도 레닌이 바랐던 이상적인 사회주의의

인간은 노동할 때는 기계와도 같이 정확하게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고, 노동이 끝나면 육체와 정신 모두

건전하게 휴식을 취하며 다음의 노동에 대비하는

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소련에서는 노동시간과

휴식시간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고, 노동의

공간과 휴식의 공간의 경계 역시 모호했다. 직장은

노동자들이 사회생활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으며, 노동자들은 업무시간에 개인적인 일을

보거나 직장으로 친지를 불러내기도 했다. 말하자면

1918년 레닌의 탄식은 기계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공장에서 그 기계의 일부가 되어야 할 러시아

노동자들이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내쉬는 한숨이었던 셈이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 두 세대가 넘는 세월이 지났다.

이 정도의 기간이면 레닌의 걱정도 풀리지 않았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1917년 혁명 직후부터 1991

소련의 해체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공장은 기계의

공간이 되지 못했다. 그곳에서는 노동자가 기계의

연장extension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기계가

사람의 연장이 되었다.

1920년대 후반 이래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

20여 년의 기간 동안 스탈린은 경제개발계획을 통해

선진 자본주의 국가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했다.

시기 러시아에는 수많은 대공장이 세워졌고, 엄청난

숫자의 농민이 산업노동자로 변신했다.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소련 정부가 잦은 정책 변동을

비롯한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동안, 현장에서는 신참

노동자들이 공장의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근이나

지각을 반복하거나 근무시간 중 술을 마시고 싸움을

하는 등의 사태들을 벌이고 있었다.

공장에서 요구하는 노동규율은 단순히 열심히

일하거나 업무에 집중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규범이다. 규칙적이어야 한다는 것. 그것은

농경사회에서 인간이 자연의 변화나 자신만의 노동

흐름, 습관에 따라 일했던 것과는 달리, 날씨와 몸

상태, 개인적 사정에 관계없이 항상 같은 시간에

출근해 주어진 업무를 반복적으로 완수하고 정해진

시간에 퇴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묘사하고 있듯, 이러한 습관이

몸에 배기 위해서는 폭력적인 강제마저 필요하다.

1930년대에 스탈린이 무단결근자를 수용소에 보내는

가혹한 법률을 공포한 것도, 계획과 달리 노동규율이

역할을 맡고 현장 노동자는 이를 실현한다는 원칙은

현실에서는 폐기되었다. 하나의 업무를 과학적으로

세분해 이를 반복함으로써 효율성을 높인다는 원리

역시, 현장 상황에 따라 한 노동자가 이질적인 여러

업무를 맡는 정반대의 상황으로 귀결되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공장 노동과 달리 소련의

공장에서 노동자는 기계적 작업을 반복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또한 소련 공장의 기계는 자본주의적 공장의

기계와는 다소 다른 성격을 지녔다. 대규모

장치산업의 경우에도, 소련 공장의 기계는 노동자 한

명 한 명의 손길에 의해 재창조된 개인적인 기계였다.

필요한 부품이 제때 공급되지 못하고 수리를 맡겨도

제때 되돌아올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기지를 발휘해 스스로 부품을 만들거나 대체할

부품을 고안하며 작은 고장은 현장에서 해결하고자

했다. 그 결과, 같은 기계라고 하더라도 공장에 따라,

또 한 공장에서도 작업장마다 각기 다른 성능을

발휘했고 서로 다른 부품으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특정한 노동자가 아니라면 그 기계를 제대로 다루기

힘들었고, 각 노동자는 기계를 자신의 분신으로

여기며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흔히 정체의 시대라고 하는 1970년대 브레즈네프

집권기 이후에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졌다. 소련의

자연과학 분야는 꾸준한 발전해왔고 자본주의

세계에서도 기술 혁신이 진행되었지만, 체제의

경직성은 새로운 기계와 기술의 도입을 가로막았다.

그래서 국가가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몇몇 산업을

제외한다면, 만든 지 20, 30년이 지난 기계를 계속

고쳐 가며 쓰는 것이 작업장의 흔한 풍경이었다.

실제로 러시아 현지를 방문했을 때, 나는

1950년대에 만든 기계를 2000년대 초반에 사용하는

것을 본 일도 있다. 2001년 현지조사를 했던

인쇄소에서 종종 멈추거나 오작동하는 기계를 가장 잘

고치는 사람은 인쇄소의 수리공이 아니라, 그 기계로

오랜 시간 일해온 인쇄공이었다.

소련은 자신이 극복 대상으로 여겼던 산업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기계화하기 위해 고심했지만,

결과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노동규율의 훈육은

기대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소련의 공장은

서구 자본주의 공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인간이

기계화되기보다는 기계가 인간화되는 공간이 되었다.

이것은 소련의 노동 문화가 지닌 다른 고유한 성격에

눈을 돌리게 만든다.

소련에서 직장이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와 같은

곳이었다.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공장이라면

어린이집, 학교, 극장, 휴양소, 병원, 클럽 등을 갖추고

있게 마련이었고, 노동자들은 공장을 통해 필요한

물품과 물품을 구입하는 데 필요한 바우처(전표)

배급받았다. 일과가 끝난 후에도 노동자들은 직장이나

직장에 부속된 공간에서 동료와 시간을 보내는 일이

흔했고, 그들의 아이들은 같은 학교에 다녔다. 괜찮은

직장이라면 근속 연수와 근무 실적에 따라 주택을

직접 공급했는데, 이 주택은 직장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의 개인적 시간과 공간,

그리고 노동에 관련된 시간과 공간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보다는 러시아 노동자들이 자주 이야기하는

대중적 구호대로, 그들에게 직장은 제2의 집이었다.

그것은 뒤집어 말하면 집은 제2의 직장이라는 의미

또한 된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 이렇게 썼다. “훈육은 때때로

격리를 필요로 한다. 다른 모든 장소와 구별되는 한

장소의 특정화와 그 안에 자신을 밀어 넣은 폐쇄가

필요하다. 이것은 훈육을 목적으로 한 단조롭고

보호된 장소이다.” 그러나 이러한 폐쇄는 소련에서는

현실화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내가 방문했던 인쇄소의

공산당 서기 빠샤는 다음과 같은 불평을 늘어놓았다.

나는 현재의 집으로 이사 오기 전에는 회사에서

준 아파트에 살고 있었지. 나는 거기 살 때에

그 어떤 나쁜 짓도 할 수 없었어. 사람들이

서로 뭘 하는지 항상 보고 있거든. 어느 날

나는 발레리[같은 부서의 노동자]에게 내

아파트 열쇠를 빌려 주었어. 발레리가 어떤

여자하고 자려고 했지. 그런데 한 이웃이 그가

내 아파트에 어떤 여자하고 들어가는 걸 보서는

이웃에 다 떠벌린 거야. 결국은 발레리의 처도

그 소문을 듣고 당에 가서 그를 혼내 주라고

말했지. 맙소사! 얼마나 끔찍한 일이야!”

직장과 가정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함으로써

상호감시와 자기검열의 촘촘한 망을 형성하는 것은

공산당 당국의 노동자 지배를 용이하게 했다.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기본적인 분리를 넘나들

수 있게, 가정은 직장에 부속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맥락에서 소비에트 시대에 중요한 기업체들이

노동자에게 주택을 배급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소련의 공장은 노동 기계로서의 인간과 인간의

분신로서의 기계, 노동과 휴식, 직장과 집이 혼재하는

느슨한 공간이었다. 그것은 기계가 스마트폰과

태블릿의 형태로 우리 일상을 파고드는 동시에 일터와

가정 사이의 고전적인칸막이가 해체되어가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연상하게 만든다. 노동이

좀더 유연하고 편리해진 대신, 우리는 근무시간

이후에도 각종 통신기기를 통해 일과 연결되어 있다.

러시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어느 날엔가 우리의

일터는 제2의 집이 되고 집은 제2의 일터가 될 수도

있다. 공산당 서기 빠샤라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맙소사! 얼마나 끔찍한 일이야!’

 

 

남영호, 신한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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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세상의 모든 집] 동물의 집-역사 없는 지붕

[특집: 세상의 모든 집] 동물의 집-역사 없는 지붕

 

동물에게도 집이 있다. 자기 몸을 숨기고 거친 환경과
적으로부터 알과 어린 새끼를 지키기 위해 동물들은
집을 짓는다. 땅 속에, 물속에, 갯벌에, 바위틈에, 덤불
속에, 나뭇가지 사이에, 나무줄기 속에, 나뭇잎 아래
그늘진 곳에, 동굴에······ 주위를 둘러보면 동물들의
집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그러나 그 집은 우리
눈에는 쉽사리 띄지 않는다.
사슴 무리 가운데에서 거인은 큰뿔사슴이다.
여느 연못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으나
북아메리카, 유럽, 아시아의 북쪽 오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키도 몸도 큰 이 사슴은
저들의 영토 안에서 적당한 연못을 골라
놓고, 보통 아침이나 저녁에 혼자 아니면
떼를 지어 매일 이 연못을 찾아온다. 파리
떼와 모기들이 극성을 피우는 여름이 되면,
큰뿔사슴은 그것들을 피하여 오랫동안 물속에
목까지 잠그고 있거나 온몸에 진흙을 처바르고
이리저리 구르면서 연못 옆 움푹 팬 곳으로
들어가 쉬기도 한다.
— 오그던 태너, 『비버와 냇물의 동물』


포유류1. 비버
포유류는 체온을 유지하고 비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포근한 재료로 집을 짓거나 따뜻한 굴속에
산다. ‘자연의 건축가’로 유명한 비버는 물 위에
집을 짓는다. 먼저 나뭇가지, 진흙, 돌을 모아 댐을
쌓는다. 댐의 길이는 대개 20-30미터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650미터짜리 거대한 댐을 짓기도 한다. 댐
안쪽에는 나뭇가지 등으로 오두막을 짓는다. 비버는
봄철에 2-8마리의 새끼를 낳는데, 오두막 안에는
새끼를 기르기 위한 방이 있다. 방은 밑단을 쌓아 수면
위로 올라오도록 짓고, 오두막 입구는 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도록 물속에 만든다.


포유류2. 청설모
도심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청설모는 큰 나무줄기나
나뭇가지 사이에 산다. 둥지는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모아서 짓는데, 청설모 외에도 여러 설치류가 이렇게
새둥지 같이 생긴 둥지를 집으로 삼는다.

포유류3. 불곰
불곰은 몸길이 약 1.9-2.8미터, 몸무게
150-480킬로그램으로 곰 중에서도 가장 체구가
크다. 바위구멍, 나무의 빈 구멍, 말라죽은 나무뿌리
밑에 이끼와 마른풀을 깔면 그곳은 불곰의 집이 된다.
불곰이 몸을 파묻고 겨우내 겨울잠을 자는 것도 바로
이곳이다.

포유류4. 박쥐
새처럼 날아다니지만 포유류의 일종인 박쥐의 집은
동굴이다. 그들은 깜깜한 동굴이나 폐광 등의 벽과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산다.
뉴기니에 서식하는 갈색바우어새는 정원이
딸린 원뿔형 오두막처럼 생긴 메이폴형
바우어를 짓는다. 수컷은 이끼를 물어 어린
나무 아랫부분 주위에 쌓는다. 줄기를 중심
기둥으로 사용해 입구 부분만 남겨놓고
잔가지를 엮어 천막집 형태로 만들어나간다.
이렇게 해서 만든 집은 큰 것은 폭 2.1미터,
높이 1.2미터에 이른다. 그다음에는
입구 쪽에 초록색 이끼를 카펫처럼 깐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색깔의 꽃과 열매를
가져와 이끼 위에 놓아 장식한다. 버섯이나
딱정벌레 날개를 추가할 수도 있다. 수컷은
자신의 정원을 정성스럽게 가꾸며, 때로는 한
곳에는 노란색 열매들을, 다른 곳에는 파란색
열매들을, 또 다른 곳에는 빨간색 열매들을
놓는 식으로 색깔별로 장식물을 배치하기도
한다. 열매와 꽃의 색이 바래면, 다른 것으로
교체하고, 낙엽이나 다른 부스러기가 정원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아주 꼼꼼하게 그것을
골라낸다.
— 마티 크럼프, 『멍청한 수컷들의 위대한
사랑』

조류1. 스윈호오목눈이
새들은 주로 직접 지은 둥지나 나무구멍 등에서
산다. 스윈호오목눈이는 강가에서 물 위로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 끝에 대롱대롱 달아맨 둥지에 산다.
둥지는 수컷이 틀고 둥지 내부의 일은 암컷이 맡는데,
알을 낳은 뒤에도 작업을 계속하여 집을 완성하는 데
3-4주가 걸린다.

조류2. 재봉새
재봉새tailorbird의 이름은 풀잎을 꿰매듯 엮어 둥지를
짓는 습관에서 나왔다. 재봉새는 깊은 컵 모양의
둥지를 지은 뒤 발견되기 어렵도록 나뭇잎을 꿰매어
감싸둔다.

조류3. 개개비와 뻐꾸기
개개비는 여러 가지 풀을 이용해 갈대 사이에 바구니
모양의 둥지를 튼다. 한배에 4-5개의 알을 낳는
개개비의 둥지는 뻐꾸기가 자기 알을 가져다 놓는
단골집 중 하나다. 뻐꾸기는 자기 힘으로 새끼를
키우지 않고, 집도 짓지 않는다. 산란기가 되면 암컷
뻐꾸기는 개개비나 종달새, 멧새 등의 둥지를 찾아가
원래 있던 알 하나를 빼내고 자기 알을 낳는다. 깨어난
새끼뻐꾸기는 경쟁자를 줄이기 위해 다른 알이나
새끼를 둥지 밖으로 밀어낸다.
어미개개비는 아기뻐꾸기를 자기 새끼라고
여기며 열심히 먹이를 물어다 나른다.
개개비(18.5센티미터)는 뻐꾸기(33센티미터)보다
작은 새다. 그래서 뻐꾸기가 세 들어 사는 개개비네
집에서는 아기새가 어미새보다 몸집이 크다.

조류4. 기름쏙독새
기름야자나무와 열대 녹나무과 나무의 열매를 먹고
사는 기름쏙독새는 식물의 씨앗이나 동물의 배설물을
모아 동굴 깊은 곳에 둥지를 튼다.

조류5. 수리부엉이
몸길이가 약 70센티미터나 되는 대형 조류인
수리부엉이는 나무줄기에 생긴 구멍이나 절벽의 틈,
암벽의 바위 선반 같은 곳에서 산다.

조류6. 오색딱따구리
오색딱따구리는 직접 나무줄기를 쪼아서 구멍을
만든다. 나무줄기는 오색딱따구리가 먹이를 구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들은 나무줄기를 두드려서 구멍을
파고 긴 혀를 이용해서 그 속에 있는 곤충의 유충을
잡아먹는다.

애벌레가 미끄러운 나뭇가지나 잎을 기어오를
때도, 거의 보이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실이
흘러나옵니다. 올라가는 동안 발에 있는 작은
발톱으로 이 실을 잡습니다. 등반가들이 절벽을
오를 때 밧줄을 타고 위로 올라가듯 말입니다.
이 가늘디가는 실이 애벌레가 미끄러지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이 줄이 하는
역할은 또 있습니다. 어린 애벌레가 길을
잃지 않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애벌레는 실을 따라가기만 하면 항상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갈 수 있으니까요.
— 박태순, 『둥지 밖으로 나온 동물건축가』

곤충1. 거위벌레
곤충의 집은 우선적으로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다. 많은 곤충들은 이
목적에만 부합하는 ‘간이식’ 집을 짓는다. 몸길이가
6-10밀리미터인 거위벌레는 나뭇잎을 돌돌 말아
알이 자랄 수 있는 요람을 만든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
애벌레는 어미가 말아준 나뭇잎을 갉아먹고 자란다.

곤충2. 쇠똥구리
쇠똥구리는 쇠똥이나 말똥으로 빚은 경단을 굴속에
가져가 그 안에 알을 낳는다. 뒷발로 몸무게의 열
배가 넘는 큰 쇠똥 경단을 굴리는 쇠똥구리는 그러나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12년부터 멸종위기야생동식물 2급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상태다.

곤충3. 무당벌레
진딧물을 먹고 사는 무당벌레는 먹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간다. 무당벌레는 하루에 200마리, 일생
동안 5,000마리의 진딧물을 잡아먹는다. 무당벌레의
애벌레는 부화하자마자 작은 진딧물부터 잡아먹고
몸을 키워가며 점점 큰 사냥감을 노린다. 무당벌레
애벌레는 먹이를 찾아 계속 옮겨 다니기 때문에 집이
없다.

따개비나 굴과 같은 연체동물이나, 히드라와
말미잘 같은 강장동물은 바닷물의 깊이에 따라
죽 열을 지어서 꼭 연립주택 같은 형태의 집을
짓고 살아갑니다. 집은 가깝게 붙어 있지만
사는 것은 혼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개미나
꿀벌, 흰개미와 같이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는
동물의 경우에 이르면, 연립주택의 벽은 모두
허물어지고 공동생활을 하게 됩니다.
— 박태순, 『둥지 밖으로 나온 동물건축가』

곤충4. 벌
한편 벌과 개미 같이 무리를 지어 사는 곤충들은
견고하고 거대한 ‘도시’를 건축한다. 그들의 도시는
각자의 역할이 철저히 분리된 계급사회로 이루어져
게들의 천국인 갯벌에는 게들이 만들어 놓은
굴 모양의 구멍으로 된 집이 수없이 많이 뚫려
있다. 좁은 공간에 이렇게 많은 굴이 있다는
것은 그 만큼 많은 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같은
지역이라고 해도 가라앉은 흙의 조건에 따라
서로 다른 종이 사이좋게 공간을 나누어 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밀물과 썰물에
의해 만들어진 갯벌 바닥의 다양한 환경 가운데
각각의 종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곳을 골라 살게
됨으로써 만들어진 자연스러운 결과다.
— 백의인, 『바닷가 생물』

절지동물
썰물 때 갯벌에 가면 갯벌생물들이 만들어놓은 굴
모양의 구멍으로 된 집이 수없이 많이 뚫려 있다. 이
수많은 굴속에서는 갯가재, 참방게, 맛조개, 갯지렁이
등이 옹기종기 모여 산다.

연체동물
한편 달팽이와 조개 같은 많은 연체동물은 집을 직접
지고 다니기도 한다. 위험이 닥쳤을 때 그들은 단단한
집 안으로 몸을 숨긴다.

파충류: 바다거북과 나일악어
파충류는 움푹 팬 곳에 살거나 구멍을 파서 집을
마련한다. 알은 보통 땅 속에 묻고, 풀잎으로 그
위를 덮기도 한다. 한배에 100-200개의 알을 낳는
바다거북은 바닷가 모래밭에 구덩이를 파고 알을 낳은
뒤 모래로 덮는다. 몸길이가 5미터가 넘고 큰 것은
7미터 급으로 악어 가운데 가장 대형종인 나일악어
역시 물가 모래땅에 구멍을 파서 25-100개의 알을
낳아 흙으로 덮는다. 흙 속에서 깨어난 어린 파충류는
태어난 곳을 떠나, 자기만의 보금자리를 찾아 떠난다.

양서류: 잎개구리
한편 양서류는 대개 물속에 알을 낳는데, 알을 감싸고
있는 젤라틴 물질만이 알을 보호해준다. 남아메리카에
사는 잎개구리는 접힌 나뭇잎 안에 알을 낳는다. 어른
양서류는 뜨거운 열기와 적을 피해 축축한 곳이나 땅
속에 몸을 숨긴다.
상어와 고래처럼 몸집이 큰 물속 동물에게는 정해진
집이 없다.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드넓은 바다를
끊임없이 헤엄치며 살아간다. 영양이나 얼룩말, 사슴
같이 몸집이 큰 초식동물들에게도 특별히 정해진 집이
없다. 육식동물이 뒤쫓아 오면 쏜살같이 도망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도망칠 수 있다. 늘 쫓겨 다니는 고달픈 삶이지만,
이들도 다른 동물들처럼 새끼를 낳아 기르며
살아간다.
있다. 꿀벌의 집은 특별한 재료로 만들어진다. 바로
밀랍이다. 벌집은 육각형 모양의 방이 촘촘하게 붙어
있어 구조적으로 매우 튼튼하다. 여왕벌이 방 안에
알을 낳으면, 일벌(모두 암벌이다)은 꽃가루를 먹여
애벌레를 기른다. 이외에도 일벌은 방에 꽃꿀을
채우고 침입자들과 싸워 집을 지키는 등 하는 일이
많다.

곤충5. 개미
불개미는 땅속에 굴을 파서 집을 마련한다. 지하의
개미집에는 여왕개미가 알을 낳는 방, 일개미들이
알과 애벌레를 돌보는 방, 겨우내 먹을 식량을
보관하는 창고, 쓰레기를 쌓아두는 방 같이 여러
용도의 방이 있다. 아프리카처럼 건조한 곳에 사는
흰개미들은 흙으로 개미탑을 쌓기도 한다.
육지와 바다가 맞닿아 있는 곳을 해변 또는
바닷가라고 한다. 이 곳은 육지도 아니요,
그렇다고 바다도 아니므로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바닷가에는 이러한
어려운 조건을 견뎌내며 살아남기 위해서
남달리 잘 숨어 지내고, 엉뚱하게 위장하며,
민첩하게 달아나는 생물들로 가득하다.
— 백의인, 『바닷가 생물』

어류1. 연어
바다와 강은 수많은 물속 동물들의 집이다. 많은
물고기들은 특별히 새끼를 기르기 위한 집을 짓지
않고 수중식물 틈에 알을 낳는다. 바다에 살다가
산란기가 되면 태어난 강으로 돌아가는 연어는
강바닥에 크기 1미터, 깊이 40센티미터 정도의
웅덩이를 파고 700-7,000개의 알을 낳는다. 알
낳기를 마친 암컷은 꼬리를 써서 모래로 알을 덮는다.
잘 알려져 있듯이 짝짓기를 마친 암수 연어는 곧
죽는다. 알은 60일 뒤에 부화하며, 깨어난 새끼
연어들은 바다로 향한다. 그들은 3-5년 뒤에 태어난
이곳으로 되돌아오게 될 것이다.
군소는 누군가 방해자가 나타나면 밝고
아름다운 보라색 연막을 곱게 피워놓고 더욱
깊은 밀월에 빠지기가 예사이다. 어둠이 깔리고
만조가 찾아오면 헤어짐을 아쉬워하듯 혼인의
증표인 라면발 같은 노랑이나 오렌지 빛의
알덩이를 해조류 사이나 바위 밑바닥에 남기고
떠나간다. 품 넓은 바다는 요람을 흔들 듯
이들을 키워 낸다.
— 백의인, 『바닷가 생물』

어류2. 파랑비늘돔
화사한 색깔을 자랑하는 파랑비늘돔의 집은 다소
특이하다. 몸길이가 90센티미터로 길고 옆으로
납작하게 생긴 파랑비늘돔은 직접 만들어낸
끈적끈적한 점액으로 된 고치 속에서 잠을 잔다.

어류3. 흰동가리와 말미잘
‘니모’의 모델이기도 한 흰동가리의 집은
말미잘의 촉수 사이이다. 말미잘은 독성이 있지만
흰동가리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기에, 말미잘 곁은
적을 피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김윤, 자유기고가
참고도서: 르네 라히르, 『동물들도 집이 있대요』(김희정 역,
사계절,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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